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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간지 기자.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출입처 덕에 문외한인 경제에도 관심을 쏟게 됨. 그래도 아직은 초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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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개인주의는 좋은 것일까.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효율적인 작용이 시장을 올바르게 서게 할 것이라 말했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1. 가와카미 하지메가 1917년 발표한 ‘빈론곤’은 이러한 말로 시작한다. “놀랍게도 오늘날 문명국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가난하다.” 약 10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은 그리 바뀌지 않은 셈이다. 왜. 국가는 부유해졌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소수의 사람이 대다수의 부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맹자는 “훌륭한 임금은 백성의 생업을 마련해주어 위로는 부모를 섬길 수 있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부양할 수 있게 하며 풍년에는 내내 배부르게 먹게 하고 흉년에는 굶어 죽지 않게 해야 합니다”라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 하다. 워킹 푸어, 비정규직 노동자, 크리넥스 인간, 일용직, 88만원 세대…. 오히려 지난 수십 년 간 진행된 ‘세계화’로 자본은 더욱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 왔고, 국가는 국내총생산과 경제발전으로 이를 면피했다. 효율적인 분배는커녕 부의 집중만 더해 갔다. 초국적 기업은 독과점으로 나아간다. 동일선 상의 공정한 경쟁은 찾기 힘들다. 이게 시장의 효율적 작동일까. 아니다. 보이지 않은 손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

2. 이기심의 호소. 현대 경제학을 뒷받침하는 말이다. 우리는 개인의 자선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한다. 나를 위한 것이 곧 모두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부자들은 사치를 즐긴다. 수요가 있는 곳엔 공급이 있기 마련. 이들 수요를 잡기 위해 사회생산력의 일부가 사치품 제조로 넘어가고 생활필수품 제조에 들어가는 생산력은 줄어든다. 왜. 간단하다. 빈곤층은 소비력이 없다. 현대사회에서 빈곤층은 ‘비 노동자’가 아니라 ‘비 소비자’로서 우선시 된다. 개인적 이기심에 비춰봤을 때 소비력이 없는 계층이 필요한 물품을 만들려는 이는 드물다. 아니, 없을 거다. 그러므로 이기심에 호소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논리는 현재 사회의 헤게모니를 공교히 하는데 사용된다. 돈이 있는 곳에 모든 게 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매우 단순하고 명쾌하지만 비인간적인 원칙. 수십 년 간 우리는 이 비인간적인 원칙을 절대신처럼 받들어왔다.

3. 가와카미 하지메는 가난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 가난은 부자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경제상의 불평등’이다. 두 번째는 국가나 남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경제상의 의존’이다. 마지막은 생활필수품조차 부족해 생활이 아닌 생존 투쟁을 해야 하는 ‘경제상의 결핍’이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가난을 물리쳐야 한다. 빈곤선에 있는, 그리고 빈곤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빈곤선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가와사키 하지메는 부자들이 사치를 줄이면 된다고 하지만 이는 너무 도덕적이다. 결국 국가의 몫이다. 빈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왜 이렇게 사냐고 묻기 전에 어떻게 가난하게 됐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한국에만 수백 만 명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4. 흔한 거짓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부자만큼 고생이 많은 사람은 없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그럼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 건 쉽나, 가난한 사람은 고생을 하지 않나. 두 질문 모두 성립이 안 된다. 우선, 가난한 사람이 천국(행복한 곳)에 간다는 말은 현실을 잊기 위한 ‘뽕’에 불과하다. 그리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천국을 간다면 누가 가난을 마다하겠나. 가당치 않다. 가난한 사람이 고생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생활이 아닌 생존을 순간순간 넘겨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앞에서 부자들의 고생을 말하는 건 오히려 사치다.

5. 그럼에도 왜. 애덤 스미스는 1759년에 발표한 ‘도덕감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체의 안이와 정신의 평화라는 점에서 보면 여러 계급 사람달은 거의 동일한 평균적인 수준에 있다. 예컨대 대로변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거지가 갖고 있는 안심은 여러 왕들이 바라는 것이나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웃기는 소리다. 가와카미 하지메는 “분에 넘치게 부유한 것이 불행한 것이라고 해서 과도하게 가난한 것이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부자가 더 고생한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들을 뽕 맞추고 △부와 고생이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연결시켜 인간적 연민을 느끼게 하며 △빈부격차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약간의 수긍을 가게 한다. 쉣! 똥같은 소리에 맹자는 이렇게 일침했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

6.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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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남자가 있다. 달에서 청정에너지원인 ‘헬륨 3’을 채굴해 지구로 보내는 게 그의 직업이다. 남자는 2주 후면 3년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와 딸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그립다. 그의 이름은 샘 벨이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툭하면 고장 나는 채굴기계를 손보려 나갔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다. 의식을 잃는다.

샘 벨이 눈을 떴다. 사고가 난 현장이 아니다. ‘사랑’이라 불리는 달 기지의 의무실이다. 그의 조수격인 로봇 ‘거티’가 말한다. 사고가 있었어요. 당신은 의식을 잃었고요. 몇 가지 테스트를 거치면 문제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 사고 현장에 간 샘 벨은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가진 샘 벨을 보게 된다. 샘 벨은 샘 벨인데, 두 사람 모두 샘 벨이다 보니 아이러니 하게도 아무도 샘 벨이 아닌 게 돼버린 셈. 모두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어느 시인의 읊조림처럼 말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샘 벨은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다. 이어지는 정체성 혼란. 그리고 어제 영상편지를 보낸 아내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영상 속 어린 딸은 다 커버린 아가씨가 돼버린 현실. 사람은 기억(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에 따른다면, 샘 벨은 두 번째 죽음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영화 ‘더 문’은 인간복제기술과 자본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노동계급을 묘하게 엮었다. 자본에겐 달에서 조작된 기억에 의지하며 외로이 일하다가 죽어가는 ‘복제인간’은 하나의 물건일 따름이다. 그래서 자본은 샘 벨이 사고가 났을 때 깨울 수많은 샘 벨을 저장해 둔다. 3년 일한 샘 벨을 가족 곁으로 보내준다면서 우주장(葬)을 치른다. ‘사랑’ 기지에는 정작 사랑이 없다. 샘 벨은 무한하고 자본은 위대하다.

공상과학영화다. 하지만 현실과 너무도 닮았다. 공간을 공사현장이 아닌 달 기지로, 시간을 현재가 아닌 미래로 설정해놔 그렇지만.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어제 했던 일을 오늘 하고 내일도 한다. 내일 모레도 할 것이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샘 벨과 다르지 않다. ‘가족에게 가고 싶다’는 조작된 기억 대신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바람이 고된 노동을 견디게 한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샘 벨이 겪은 외로움의 끝은 우주 쓰레기. 내일의 바람은 오늘에 대한 탄식, 한숨, 한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가난의 굴레다. 그 사이 자본은 살을 찌운다.

영화는 사랑에서 탈출한 샘 벨이 자본을 고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샘 벨이 채굴하는 기계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는 순간이다. 허나 현실은 냉랭하다. 한국 사회 임금 노동자의 과반수가 비정규직이다. 적하효과는 없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정부는 ‘노동유연성’만을 강조한다. 야만이다.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전태일 열사의 유언이 30여 년이 지나도 유효한 사회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은 더욱 애잔하다. 여기 사람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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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아마 나도 비정규직이 될런지 모른다. 하지만, 나와 같은 대학생들 대부분은 비정규직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왜 일까. 그것은 자기배반화요, 사회화라는 사회통합과정의 산물이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노동’은 단순히 생존수단의 확보차원을 넘어서 창조적인 자기실현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실현을 가능케 하는 것인 인간의 노동력이 하나의 상품으로서 매매될 수 있는 것이 됨으로써 인간 개개인도 하나의 상품으로서 취급되는 결과가 빚어지게 되었다. 노동은 자신의 자발적인 자기실현행위로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강제된 행위로서만 나타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인간화하는 것이어야 했던 노동은 오늘에 이르러 자신을 더욱 비인간화하게 하고 있다. 그저 상품으로.

 

   2006년 1월에 개봉되었던 실화를 다룬 영화, <홀리데이>에서 이정재(실제인물 지강현)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한 서린 외침을 세상에 내뱉어낸다. 돈 있으면 죄도 없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학 한국학 부교수는 어느 책의 추천사에서 대학민국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정도가 아니고 차라리 ‘유전즉신 무전즉수(有錢卽神 無錢卽獸)’, 돈이 있으면 인간이상의 신과 같은 대접을 받고, 돈이 없으면 인간이하의 동물도 못한 대접을 받는다고 말을 했다. 세계적 슈퍼국가이자 깡패국가 미국의 뉴올리언스 사태가 말을 해 주듯이 물신에 의한 인간소외는 우리나라라고 종주국의 현실에 벗어날 수 없다. 카를 슈미트는 자신의 저서 <정치신학>에서 ‘비상사태를 판단할 권리를 가진 자가 주권자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과연 ‘주권’자임을 선거기간, 월드컵 때 빼고 언제 느낄까?”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나는 ‘현실적 자금력을 가진 자가 주권자다’라고 호모에코노미쿠스의 사회를 생각해본다.

 

   소득 상위 10%계층의 초등학생 사교육비는 29만 2000원으로 소득 하위 10%계층의 월 사교육비 지출액(3만 6000원)의 약 8배에 이른다는 뉴스를 며칠 전 접했다. 사회적 연봉으로 나누어지는 이른바 경제적‘계급’ 관계에서 이미 또 다른 악순환이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사회 양극화는 대통령이 문제제기할 정도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지만 양극화의 범위만이 넓어질 뿐 양극화의 폭은 좁아지고 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서서히 박정희 식 병영자본주의를 이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신자유주의적 모델의 실체가 드러난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학 한국학 부교수의 말을 다시금 빌리면 “신자유주의의 ‘게임 룰’을 한번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본은 곧 노동을 고립시키고 박멸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동의 고립, 소외, 박멸…….

 

   노동‘양극화’, 교육‘양극화’, 주택‘양극화’ 등, 수많은 사회양극화란 악성종양 때문에 피를 토하고 있지만 결국 모두의 문제가 아닌 소수의 문제일 뿐이다. 20⁄80의 사회에서 80이 사회의 다수이면서도 ‘소수’이어야 되는 상황은 정말 아이러니하지만, ‘유전즉신 무전즉수(有錢卽神 無錢卽獸)’의 사회에서는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수’이면서도 ‘소수’가 되어야 하는 이상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는 사회양극화란 악성종양의 한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창조적 자기실현의 노동을 떠나 객체화된 노동의 현 주소, ‘비정규직’을 말이다. 이들의 아름다워야 될, 인간다워야 될 삶 속에는 낙인이 서려있다. 나는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이들의 고귀한 몸부림으로부터 언뜻 슬픔 깃든 주홍글씨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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