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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간지 기자.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출입처 덕에 문외한인 경제에도 관심을 쏟게 됨. 그래도 아직은 초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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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11.23 영화 ‘더 문’과 비정규직

여기 남자가 있다. 달에서 청정에너지원인 ‘헬륨 3’을 채굴해 지구로 보내는 게 그의 직업이다. 남자는 2주 후면 3년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와 딸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그립다. 그의 이름은 샘 벨이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툭하면 고장 나는 채굴기계를 손보려 나갔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다. 의식을 잃는다.

샘 벨이 눈을 떴다. 사고가 난 현장이 아니다. ‘사랑’이라 불리는 달 기지의 의무실이다. 그의 조수격인 로봇 ‘거티’가 말한다. 사고가 있었어요. 당신은 의식을 잃었고요. 몇 가지 테스트를 거치면 문제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 사고 현장에 간 샘 벨은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가진 샘 벨을 보게 된다. 샘 벨은 샘 벨인데, 두 사람 모두 샘 벨이다 보니 아이러니 하게도 아무도 샘 벨이 아닌 게 돼버린 셈. 모두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어느 시인의 읊조림처럼 말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샘 벨은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다. 이어지는 정체성 혼란. 그리고 어제 영상편지를 보낸 아내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영상 속 어린 딸은 다 커버린 아가씨가 돼버린 현실. 사람은 기억(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에 따른다면, 샘 벨은 두 번째 죽음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영화 ‘더 문’은 인간복제기술과 자본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노동계급을 묘하게 엮었다. 자본에겐 달에서 조작된 기억에 의지하며 외로이 일하다가 죽어가는 ‘복제인간’은 하나의 물건일 따름이다. 그래서 자본은 샘 벨이 사고가 났을 때 깨울 수많은 샘 벨을 저장해 둔다. 3년 일한 샘 벨을 가족 곁으로 보내준다면서 우주장(葬)을 치른다. ‘사랑’ 기지에는 정작 사랑이 없다. 샘 벨은 무한하고 자본은 위대하다.

공상과학영화다. 하지만 현실과 너무도 닮았다. 공간을 공사현장이 아닌 달 기지로, 시간을 현재가 아닌 미래로 설정해놔 그렇지만.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어제 했던 일을 오늘 하고 내일도 한다. 내일 모레도 할 것이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샘 벨과 다르지 않다. ‘가족에게 가고 싶다’는 조작된 기억 대신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바람이 고된 노동을 견디게 한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샘 벨이 겪은 외로움의 끝은 우주 쓰레기. 내일의 바람은 오늘에 대한 탄식, 한숨, 한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가난의 굴레다. 그 사이 자본은 살을 찌운다.

영화는 사랑에서 탈출한 샘 벨이 자본을 고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샘 벨이 채굴하는 기계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는 순간이다. 허나 현실은 냉랭하다. 한국 사회 임금 노동자의 과반수가 비정규직이다. 적하효과는 없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정부는 ‘노동유연성’만을 강조한다. 야만이다.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전태일 열사의 유언이 30여 년이 지나도 유효한 사회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은 더욱 애잔하다. 여기 사람이 산다.

posted by 펜의팬 펜의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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